“심심한 날~ 친구가 필요한 날~ 나는 나는 지도를 보죠~” 한가한 어느 더운 여름 날, 친구가 부족한 불쌍한 친구는 인터넷 지도로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동네 아저씨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곡만 논밭이었던게 아니라, 옛날에는 여기도 다 논밭이었어~” 여기서의 ‘여기도’는 바로 방화2동. 동산슈퍼(지난 호 아까뷔.. 강서 참고)가 있었던 동네다. 음.. 여기가 다 논이었었다고? 그럼 언제부터 논밭이었던 동네가 택지로 개발된 걸까? 방화2동이 논밭이었던 시절에는 동산슈퍼도 없었을텐데. 바로 확인해보면 된다. 친구가 부족한 불쌍한 이 친구는 언제 어디서든 신기하고 귀여운 친구를 만들 수 있다. 바로 국토지리정보원의 국토정보플랫폼에서 제공하는 구지도 서비스! 먼저 동산슈퍼의 과거의 지도에서 어디 쯤에 존재했는지, 그 주변의 상권은 어떠하였는지를 확인해보기로 한다. 동산슈퍼의 <담배소매인지정서>를 통해 동산슈퍼의 영업 개시일이 1979년 7월 1일이라는 것을 알아냈으니, 동산슈퍼의 장소가 반영된 지도를 살펴보려면 1980년대의 지도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방화2동의 길>

1980년대의 강서구 방화동 일대의 지도에 표시된 길은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고 단조롭다. 지금의 지도를 비교해보니 동산슈
퍼의 자리는 지금과 같은 Y자 형태가 아닌 단순한 일자형 골목의 중간이다. 아마 Y자 골목은 이 지도가 제작될 당시만해도 존재하지 않은 듯 하다. 동산슈퍼 주인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원래 작은 구멍가게를 한참 하다가 그 자리에 새로 건물을 지었어. 지금 이게 그 건물이야” 부동산 등기부등본을 확인해보니, ‘동산슈퍼’가 있었던, 그리고 현재 작은과자점 ‘공활’이 있는 자리의 건물은 1986년에 지어졌다. 1986년에 지어진 건물이 Y자 골목의 동선을 반영(주택 및 가게 출입구의 위치와 방향 등)하여 만들어진 것을 보았을 때, 새로운 골목은 1986년 이전에 만들어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한쪽 길만 접하고 있던 동산슈퍼의 출입구의 방향도 이때 생긴 Y자 형태의 골목을 반영하여 변경되었을 것이다.

그럼 동산슈퍼가 없었던 시절, 여기가 다 논밭이었던 시절의 방화2동은 어땠을까? 1970년대의 지도를 살펴보면 이 일대가 다 논밭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80년대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단조로운 길도 이때는 없다. 그런데.. 유심히 보니 1980년대의 단조로운 길모양 그대로 논 수로가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수로는 지도 왼쪽의 동부간선수로(김포시, 서울 강서구, 부천시 일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던 수로)에서 파생된 작은 논수로로 방화2동에 위치했던 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동산슈퍼가 생겼던 1979년 즈음 방화2동의 농지를 택지로 변경하면서 작은 수로를 복개하여 길로 만들었던 것이다! 어쩐지 이 동네 골목 골목마다 원형 맨홀 뚜껑이 수상할 정도로 많더니, 이 동네의 길 대부분이 복개천이이었다. 도시화 과정에서 복개를 통해 도로를 만드는 방식은 매우 많이 활용되는 방식이었다. 기존 토지 소유자의 매입 혹은 보상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하천 혹은 수로를 덮어 바로 도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방화2동의 길 역시 역시 이러한 사정 등으로 기존 수로의 모양대로 만들어진 듯 하다.


<수용소 마을>

1970년대의 지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흥미로운 단어가 있다. 바로 ‘수용소 부락’. 대체 수용소 부락이 뭐지? 서울역사편찬원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서울지명사전에서 ‘긴등’과 함께 ‘수용소마을’에 대한 정보를 찾아볼 수 있다.

긴등
강서구 방화동과 마곡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두 동의 이어지는 부분인 개화산 긴 등성이에 형성된 마을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긴등은 광복 후에 새로 생긴 마을로 집들이 雉峴(치현)을 중심으로 길게 산재해 있었는데 방화동 247, 607~609번지 일대이다. 긴등의 서쪽 끝에는 수용소말이 자리잡고 있었다. 수용소마을은 6.25전쟁 뒤에 황해도 송화군에서 월남해왔던 피난민들의 수용소가 해체되자 그곳에 수용되어 있던 사람들이 이 일대에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출처 :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지명사전)

방화2동의 구지도와 서울역사편찬원의 자료를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지금의 방화2동은 1970년대까지만해도 농지였고, 넓은 논 어딘가에 한국전쟁 시기 황해도 송화군에서 피난온 사람들의 수용소(1950~1970년대)가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1970년대 중후반(동산슈퍼가 생겨났던 1979년 즈음) 이르러 수용소가 해체되고 피난민 중심으로 정착 마을이 생겨났다. 아마도 그 마을이 동산슈퍼가 있던 그 자리 중심으로 형성된 방화2동 일대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현재 방화뉴타운 제2구역과 제3구역에 걸쳐있는 수많은 단층 주택들에서 옛 수용소마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갑자기 ‘공활’의 부동산 계약을 할때 동산슈퍼 주인 할아버지의 대리로 나오신 아드님께서 해주신 당부 의 말씀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이북분이셔서 고집이 세고 아주 깐깐해요. 좀 까딸스럽게 구셔도 젊은 분들이 이해를 해주세요~” 아, 동산슈퍼 주인 할아버지도 황해도 송화군 출신이신걸까?!

아마 1960~70년대의 항공사진을 찾아보면 수용소마을의 힌트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창밖을 보니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과거 지도를 살펴보면서 그때 그 시절의 모습을 상상하다보니 하루가 다 갔다. 수용소마을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 찾기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자. 오늘 하루도 참 잘 놀았구나. 너란 지도.. 역시 좋은 친구였어!

현승인이 찾고 보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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