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없는 영화광의 첫 대사 아카이브

“살아 있는 천사라지요?”

저는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일주일에 적어도 서너 편은 보는 것 같아요. 영화는 인간의 다양한 행동 양상을 제작진의 의도에 맞춰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표현 방식 역시 제작진마다 다르기 때문에각자의 색깔을 음미하며 보는 재미도 있어요.

그렇지만 딱히 가리는 장르는 없습니다. 영화를 분석하거나 상징과 미장센을 해석하지도 않습니다. 영화에서 표현되는 이미지, 배우들의 표정과 대사, 플롯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즐길 뿐이에요.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여운을 남기는 영화든, 매 장면마다 어리둥절해지는 요상한 영화든 저에게는 별반 등급을 매길 거리가 아닙니다.

이렇게 깊이 없이 영화를 보는 저만의 방식은 바로 영화 스토리의 로그를 남기는 일입니다. 본 영화가 많다보니, 스토리가 뒤죽박죽 섞이거나 제목만 들어서는 무슨 영화였는지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본영화가 무엇인지 기억해 두는 것, 영화의 스토리를 떠올릴수 있는 것. 이 두 가지가 중요해졌습니다. 기록을 남길 필요가 생겼어요.

미니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보기로 했습니다. 굳이 프로그래밍을 할 게 아니었기 때문에 웹 페이지로 간단히 표현할수 있는 노션(Notion)을 사용했습니다. 데이터베이스의속성으로 ‘제목’, ‘장르’, ’개봉 연도’, ‘영화를 본 날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대사’를 넣었습니다. 보통 영화의첫 장면은 부지불식간에 휙 넘어가 기억에서 사라지곤 하죠. 하지만 영화의 분위기, 장르를 인식하거나 플롯을 인지하는 지점은 바로 첫 장면입니다. 우리의 무의식 중에 영화의 컨셉을 고정해주는 역할을 하죠. 첫 번째 대사 역시도 그런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2005년 개봉한 ‘친절한 금자씨’의 첫 대사는 “살아 있는 천사라지요?” 입니다. 금자씨가 감옥에 있는 동안 회개하고 봉사했던 천사 같은 모습을 전해 들은 한기독교 신자의 대사예요. 이들은 곧 출소할 금자씨를 기다리는 환영단입니다. 금자씨의 천사 같은 외모와 복수를 꿈꾸는 내면이 앞으로 어떤 행동을 보일지 기대하게 하는 장면이죠. 이렇게 스토리가 떠오르면, “너나 잘하세요”같은 명대사가 왜 나왔는지도 기억이 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모은 데이터 다발을 아카이브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각각의 데이터가 그냥 쌓여서 외따로 노는 게 아니라데이터 속성을 이용해서 다양한 조합으로 활용할 수 있으니까요. 노션의 공유 기능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기 시작했어요. (인스타그램 @hjs__simulacre) 하나하나 로그가 쌓이다보니 갤러리가 제법 풍성해지기도 했고, 몰랐던 저의 취향을 은근히 보여주기도 하는 것 같더라고요.

“기억하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되나요?” 우리가 자주 묻는 이질문은, “기억하지 않으면 흔적이 남지 않아 누구도 모르는없던 일이 되어 버린다”의 줄임말처럼 들립니다. 영화 이야기하는데 웬 오바를 떠나 싶지만 아카이브의 본질과 존재이유를 통달하는 말인 것 같아 한 번 써봅니다. 제가 영화를 매일 보는 일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으면 사라질, 그러나 저만의 편안한 시간들이었죠. 그런데 로그를 남기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아카이브를 만듦으로써 제가 소비한 시간에흔적이 남았습니다. 온라인 공간에 기록을 고정해 두어서,내 시간을 “흘려보낸 것"이 아니라 “남겨둔 기억"으로 만들어 낸 거죠.

정혜지 @hjs__simulacre

You may also like

Back to Top